「푸른 카벙클」이라는 단편에서 홈즈는 한 중절모를 주운 뒤, ‘이 중절모의 크기가 상당히 큰 걸 보니, 머리가 큰 그는 지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추리물의 핵심은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부조리한 문제를 해결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근대에 나타난 특정한 형식의 문학이죠. 왜 이런 문학이 등장했을까요?
서구 사회는 중세에 들어서서 그리스도교라는 거대한 세계관으로 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지역이 정교한 일치를 보이는 그런 통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느슨하게 공유하면서, 각 지역마다 각자 좋을 대로 신비한 미신이나 이단 등을 믿었죠. 카톨릭 자체에도 구마라던가, 성찬제라던가 하는 의식들에도 신비적이고 마법적인 부분들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저는 카톨릭의 이런 점들이 현실 세계관의 빈틈을 허구로 메우려는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꽤 잘 어필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중세까지의 인류는 마법적인 세계관 속에서 일상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간 인류가 공유해 왔던 이 마법적 세계관을 내쫓기 시작했죠. 성찬제는 그냥 은유일 뿐이라더라(이런 사람들은 종교개혁을 했죠),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더라 등등. 그간 인류가 가져온 모든 세계관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자기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시대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공포와 분노를 동력으로 버티려고 하는 파가 있고, 다 때려 엎고 새 시대의 카펫을 깔려는 파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때려 엎으려는 파는 점점 강해졌죠. 오랜 중세의 염증과 결합해서, 아예 극단적으로 인류의 모든 허구적 습성, 어두운 곳에 도사리고 있던 미신적 세계관을 모두 내쫓아서 과학과 이성의 빛으로 밝혀야 한다는 가치관이 부상합니다.

이렇게 근대 계몽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이 세계는 합리적인 이성을 숭배하는 세계입니다. 과학을 잘 알고 진보적인 지식인 층은 새로운 시대의 영웅으로 부상합니다. 과거의 신비주의적 종교관, 봉건적 인습, 무지몽매한 미신 등에서 벗어나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밝히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를 ‘탈마법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탈마법화된 계몽시대의 사조가 반영된 소설이 이성과 합리성, 논리적 인과관계가 명확한 추리소설인 것입니다.
왜 추리소설에서는 3막에 이르면, 탐정이 모두를 불러 모아 거창한 해설 타임을 가질까요? 그것은 무지몽매의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지식인이 계몽을 하는 순간으로 빗대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 장르물로서의 추리소설의 틀은 이렇게 얻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우리는, 이러한 근대의 계몽주의가 또 완벽하게 동작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 단점과 그림자까지 이미 알고 있죠. 심지어 추리물에서 ‘오오 과학적!’이라며 받들어 모셔지던 이성과 합리성,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매끈한 설계 자체가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푸른 카벙클」에서처럼 머리가 크면 지적인 사람일까요? 이것은 당시에는 과학으로 받아 들여졌던 골상학에 기반한 추론입니다. 지금은 골상학은 과학도 무엇도 아니죠. 많은 추리물에서의 단골 설정인, 오컬트 현상으로 착각하게 하기 위해서 살인을 연출해서 보여주는 부자연스러운 계획들은 또 어떤가요? 평소 상냥하던 여학생이 처음 해본 살인을 퍼즐처럼 만들기 위하여 전지 가위로 직접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잘라 머리만 가지고 도망간다는 설정이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요? 그야말로 ‘추리물’이라는 장르 기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합리입니다.
또한 장르물에서의 플롯이란, 원인과 결과가 원자 단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정교한 건축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입니다. 실제 인간 세계는 이야기 속의 세계처럼 그렇게 돌아가지 않죠. 인간 세계는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잠재된 영토이며, 이 모든 사건은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닌, 그저 해프닝일 뿐입니다.
보르헤스의 「죽음과 나침반」을 봅시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고 치밀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대하는 탐정 렌로트는, 그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음’을 믿는 태도 때문에 덫에 걸립니다. 첫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지만, 범인은 ‘렌로트라면 우연을 믿지 않고 그 이면을 탐구하겠지’라고 믿고 다음 사건부터 함정을 설계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연한 해프닝’으로 생각했다면 렌로트는 덫에 걸리지 않았을 테죠.

진짜 현실 앞에서 근대의 합리성은 그야말로 마법입니다.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스스로 만든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종내에는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간 셈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렌로트야말로, 근대의 이성 만능주의의 종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형식까지 파괴하지 않습니다. 사실 보르헤스는 그 형식을 일부러라도 아주 엄격히 따르고 있죠. 사건이 발생하고, 탐정이 추론을 통해서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 뒤, 이를 해설합니다. 추리소설의 3막 구조로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막에서는 사건의 일반적인 사실들이 제시되고, 2막에서는 이면의 진실이 드러나며, 3막에서는 탐정이 진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해설합니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라가면서도, 결국에는 이성이 무화되고 마는 보르헤스의 설계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추리물이 장르로서 작동하는 ‘형식’만이 남고, ‘이성 숭배’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매끈한 장르물에 부조리를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그리고 탐정은 부조리한 현실을 근대의 합리성으로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마법적 사실주의가 완성됩니다. 이제는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설명하던, ‘명석한 주인공이 합리적 추론을 통해서 불가사의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정의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리소설의 계보를 잇되, 더 이상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정의로는 설명하기 힘들어진 현대의 이러한 장르를 미스터리 장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덧) 하지만 전 여전히 근대 정통 추리 소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전히 개연성이라는 마법에 걸려 있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