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밀밀의 구조와영화적 장치 분석

  1. 들어가는 말
  2. <첨밀밀>의 줄거리
  3. 3장 구조로 분석한 <첨밀밀>
  4. <첨밀밀>의 영화적 장치 분석

1. 들어가는 말

진가신(陳可辛) 감독의 <첨밀밀>은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1997.07.01)을 앞둔 1996년 늦가을에 개봉된 영화이다. ‘홍콩 드림’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2007년 타임지에 의해 그 해의 세계 10대 영화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첨밀밀은 꿀처럼 달콤하다는 의미로,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 대만 출신의 가수 등려군(鄧麗君)의 동명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다.

영문 제목은 <동지들: 거의 러브스토리에 가까운 Comrades: Almost a Love Story>이다. 중국 본토에서 인민들끼리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동지’라는 이 단어는, 본 영화에서 타지인 홍콩에서 두 중국인 연인이 서로를 의지하고자 하는 연대감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단어를 제목에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홍콩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식민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륙 중국인들은 이 식민지를 기회의 땅으로 여겼고, 반대로 홍콩이 해방되는 순간에는 대륙에게 ‘꿈의 땅’으로서의 가능성이 통째로 수탈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그려지는 두 주인공과의 만남과 이별은, 단순한 로맨스로 보기보다는 홍콩과 대륙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분석되곤 한다. 그러나 본고는 첨밀밀의 사회적 고찰보다는 오히려 좀 더 장르적 가능성에 대해 집중해보고자 한다.

많은 수상 실적과 흥행 실적이 증명해주듯 <첨밀밀>의 구조는 짜임새가 있고 몰입도가 높은데, 장르적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3장 구조와 규칙들을 성실히 갖추면서도 동시에 비튼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서 사용되는 도구적 장치의 사용과 높은 대사의 완성도로 밀도 있는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

2.첨밀밀의 줄거리

여자 친구 소정과 결혼하고 정착할 돈을 벌기 위해 홀로 홍콩에 온 중국 출신 여소군. 우연히 같은 중국인 이교를 만나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홍콩드림을 꿈꾸고 있던 이교에게 중국 남자인 여소군은 원하던 상대가 아니다. 친한 친구일 뿐이라며 선을 그은 채, 둘은 서로 타지의 외로움을 달래는 각별한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교가 큰 빚을 지면서 친구 관계조차 흔들리게 되고, 미래가 불확실해진 이교와 자리를 잡아가던 여소군은 결국 헤어진다. 여소군은 소정을 데려와 결혼함으로써 원래의 꿈을 이루고, 이교 역시 조직폭력배 보스인 구양표를 만나 원하던 경제적 출세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둘은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지만, 구양표의 삶이 위기에 처하자, 이교는 여소군 대신 구양표와 함께 홍콩을 떠나 버린다.

그럼에도 여소군은 소정과 헤어져, 뉴욕으로 가서 이교만을 기다리는 삶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구양표도 죽고 뉴욕에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 이교는, 3년 간 여행 가이드 일로 겨우 비자를 마련한다. 그렇게 10년 동안 돌아가지 못했던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드디어 항공권을 발급받던 날, 이교는 운명적으로 여소군을 다시 마주친다.

3. 사랑 플롯의 3장 구조로 분석한 <첨밀밀>

보통은 3막 15장이란 용어로 분석하는 것이 정설이나, 이 글에서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3장 구조라는 용어로 쓰고자 한다.

1장: 설정

①시작: 중국 대륙 출신 청년 여소군은 돈을 벌기 위해 홍콩에 왔지만,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친구도 없어서 적응하기 힘들다. 그 와중에 우연히 북경어를 할 줄 아는 여성 이교를 만나 감정적으로 의지한다. 이교는 여소군과 같은 대륙출신임에도 홍콩 토박이인 척 하며 어수룩한 여소군을 속이고 이용한다.

②계기적 사건: 그러던 중 똑같이 좋아하는 등려군 노래를 함께 부르는 등 서로에 대한 호감이 싹트기 시작하고, 여소군은 구정 대목을 노려 등려군 테이프 장사로 한 몫 잡겠다는 이교의 계획을 돕는다. 그러나 장사가 실패하면서 감정적으로 취약해진 둘은, 외로운 이방인으로서 서로가 유일한 친구임을 터놓으며 선을 넘고 만다.

●플롯포인트1: 여소군은 대륙에 두고 온 여자 친구 소정에게 죄책감을 느끼던 찰나, 이교의 뜻에 따라 연인이 아닌, 친구로 남기로 결정한다.

2장: 대결

③갈등 고조: 둘은 친구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지속적으로 육체관계를 갖고 함께 생활하며 점점 정이 깊어진다. 그러나 이교의 꿈은 크게 출세하여 꿈의 땅인 홍콩의 진짜 주민이 되는 것이므로 중국 본토 남자와의 결혼은 강하게 거부한다. 이교에게 홍콩은 꿈과 미래의 땅이며, 중국은 버려야 할 가난하고 죽은 사회이다. 여소군은 이교의 거부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던 중 중국 반환일이 다가와 홍콩 주가는 폭락하고, 출세는커녕 큰 빚을 진 이교의 미래는 불확실해진다. 게다가 여소군이 친구 사이의 선을 애매하게 하는 등 눈치 없는 행동으로 화나게 하자, 이교는 서로는 서로의 꿈이 아님을 선언한다. 결국 여소군은 이별을 통보하고, 혼자 남게 된 이교에게 조직폭력배 두목 구양표가 다가온다.
이교와 헤어진 여소군은 처음의 목적대로 착실히 일하며 부주방장까지 승진, 소정을 데려와 결혼식을 올린다. 여소군의 결혼식에, 역시 경제적 출세의 꿈을 이룬 이교가 구양표와 함께 참석하면서 둘은 3년 만에 재회한다. 둘은 각자의 꿈을 이뤘음에도 행복은커녕 허무감만 느끼던 상황이다.

④최고 갈등: 여전히 서로를 갈망하던 여소군과 이교는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애쓰지만, 결국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선을 넘음으로서, 그간 이룬 모든 것을 날려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플롯포인트2: 여소군과 이교는 지금까지 이룩해 온 각자의 꿈과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서로를 선택하기로 한다. 그러나 마침 구양표가 분쟁에 휘말려 급히 밀출국하게 되면서, 이교는 또다시 여소군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줬었던 구양표를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이교가 떠났음에도 여소군은 소정과 관계를 정리한 뒤, 뉴욕으로 건너가 이교만을 추억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3장: 해결

⑤클라이막스: 여소군은 이교를 자신의 마지막 사랑으로 간직한 채로, 뉴욕에 있는 중국요리점의 부주방장으로 살아나간다.
한편 도망자 신세이던 이교도 우여곡절 끝에 구양표와 함께 뉴욕까지 와서 정착하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구양표가 죽고 만다. 그 사고 탓에 미국 정부에 발각되어 홀로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는 입장에 처한다. 공항으로 호송되던 중, 여소군을 발견한 이교는 그를 쫓아가려다 그만 도망친 셈이 되어 의도치 않게 불법 체류자가 된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예전의 홍콩이 그랬었던 것처럼, 중국이 새로운 꿈의 지역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비자가 만료된 이교는 고향이던 중국에조차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교가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3년 간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안, 여소군은 주방장으로서 점점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⑥엔딩: 무사히 비자를 받고 항공권까지 받는데 성공한 이교가 드디어 뉴욕을 떠나기 직전, 등려군이 사망한다. 등려군의 사망 기사가 흘러나오는 한 가게의 쇼윈도 앞에서 헤어졌던 이교와 여소군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둘은 10년 전, 처음부터 같은 차를 타고 홍콩에 도착했던, 운명적 사랑이었다.

4. <첨밀밀>의 영화적 장치 분석

1) 정서적 교차점으로서의 등려군의 노래(1986년 3월 1일)

기차를 타고 홍콩에 도착하는 여소군. 도착해도 곤히 잠들어 있어서 못 내리고 있다. 그때 ‘동지, 역에 도착했어요.’ 라는 누군가의 말에 뒤에서 누군가가 일어나는 바람에 잠이 깬다. 잠이 깰 때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무방비한 연기나, 두리번거리며 역 밖으로 나가는 행동 연기로, 그가 어수룩한 캐릭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때 사용되는 ‘동지’라는 말은 뒷자리의 여성(이교)과 여소군, 둘 다를 향한 호칭이다. 이로써 둘 다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란 점도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3장 구조란 것은 전체 플롯에서도 적용되는 구조이지만, 하나의 씬도 이렇듯 3장으로 구성하면 밀도와 몰입감이 생긴다. 1장은 어수룩한 중국 청년 여소군의 홍콩 도착, 2장은 내리고자 하지만 못 내릴 뻔한 긴장감, 3장은 간신이 내리는데 성공하는 식으로 씬을 구성했다. 이 씬을 굳이 3장으로 구성하여 집중도를 높인 이유는, 이 씬으로 다시 돌아오는 엔딩을 위하여 관객의 기억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여소군은 두리번거리며 낯선 홍콩 도시를 지나, 고모의 집에 도착한다. 이 집은 성노동 여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1인칭 여소군의 시점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 말한 뒤 문을 쾅쾅 닫아댈 때마다 검은 화면을 삽입하는 연출은, 관객에게 여소군이 이방인으로서, 타지에서 거부되는 것 같은 느낌을 좀 더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거주 환경도 최악이다. 소정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고모는 나에게 따로 지낼 수 있는 독방을 주셨어. 전기도 들어오고, 화장실도 딸려 있어서 편해.’ 라는 여소군의 편지 내용과 함께 비춰지는 샷들은 낡은 백열 전등, 더러운 세면대, 그리고 성노동 여성들이 갑자기 들어와 시끄럽게 토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이런 대사로 여소군의 상냥한 성격을 전달하면서, 상황과 대사가 정반대로 드러나는 연출적 재미 또한 추구되고 있다.

고모는 성노동 여성들에게 세를 주는 건물의 주인으로 보이는데, 이는 여소군의 순진한 편지글로 확인할 수 있다. ‘홍콩 사람들은 참 이상해. 일하지 않고 낮엔 자다가 밤에 예쁘게 차려입고 놀러 나가.’

많은 연출이 ‘친애하는 소정’이라고 시작되는, 여자 친구를 향한 편지 나레이션이 현재 여소군의 상황 위로 겹쳐진다. 이는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압축하여 전달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법이다. 이 기법을 통해 여소군이 현재 겪는 상황과, 과거의 상황이나 여소군의 생각, 카메라로는 다 보여주지 못하던 정보까지 밀도 있게 전달하고 있다.

한 편, 고모는 윌리엄 홀든이라는 서양 배우에게 푹 빠져있다. 고모는 과거에 자신이 그와 연애했다고 믿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고모가 망상에 빠져있는 것처럼 연출된다. 고모와 함께 지내는 입이 거친 포주 남성은, 고모가 윌리엄에게 집착한 나머지 미쳤다고 확신하며, 근거가 될 만한 일화로 고모가 길거리의 아무나 보고 윌리엄이라고 부르더란 말을 해준다. 고모가 동양인인 여소군에게 ‘너는 윌리엄을 닮았구나.’라고 말한 것도, 포주 남성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여소군은 닭을 잡아 배달하는 곳에 취직한다. 이 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장치로서 여소군을 상징하고 있다. 배달 일은 무척 고되지만, ‘일은 할만 해. 당 간부도 나보다 많이 벌지 못할 거야’ 라며 소정을 안심시킨다.

그러던 중, 어느 밝은 날에 아이들이 던진 배구공을 받게 된 여소군은 그것을 힘껏 받아친다. 로우앵글에 노출 값이 높은 샷은 지금까지 힘들게 했던 홍콩에 대해 여소군의 반격을 의미한다. 바로 활기찬 음악이 이어지며 어느 새 홍콩에 익숙해진 채 열심히 일하고 언어를 배우고,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홍콩을 즐기는 여소군의 모습이 등장한다.

곧이어 소정의 편지에 대고 여소군은 자랑스럽게 ‘이제 무석사람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 볼 것’이라고 선언하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빨간 우체통이 포커스 아웃되며 비슷한 자리에 빨간 맥도날드 로고가 떠오른다. ‘무석사람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은 바로 이 맥도널드였다’는 의미의 세련된 샷의 연결이다.

시장 개방을 상징하는 장치인 맥도널드에서, 여소군은 광둥어를 할 줄 몰라 머뭇거리며 주문을 지체시킨다. 이에 주문을 받던 여주인공 이교는 난처한 듯, 남들이 들을세라 몰래 중국 표준말로 여소군을 도와준다. 이어 맥도널드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본 여소군은 지원하려고 하지만 광둥어나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탓에 매니저에게 무시당한다. 자신의 연락처를 매니저에게 전달하기 위해 여소군은 표준말을 쓸 줄 아는 이교를 기다려 말을 건다. 이교는 여소군의 어수룩함을 이용해서, 형편없는 사기성 영어학원에 등록시키고 소개비를 챙길 생각을 한다. ‘영어를 배우면 맥도널드에서 일할 수 있나요?’라는 여소군의 질문에 ‘영어를 배우면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고 답하는 이교와, 다시 여소군이 ‘하지만 난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게 행복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씬은, 둘은 정반대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임을 보여준다.

로맨스물로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의도적으로 말을 거는 이 장면의 시퀀스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개연성이 높게 설계되어 있다. 시골 중국인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인 맥도널드에 간다➔주문을 못해서 표준화를 쓰는 여주인공에게 도움을 받는다➔선망하는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표준말을 쓸 줄 아는 여주인공에게 다시 말을 걸 수밖에 없다➔그 탓에 어리숙함이 드러나서, 그대로 이용당하게 된다.

영어학원에서 여소군을 등록시키면서 소개비를 챙기려는 이교에게 한 학원관계자가 ‘또 동포 등을 쳐 먹는구나, 이 광주 아가씨야.’ 라는 말을 한다. 이 대사를 통해 이교도 중국 본토에서 왔으나, 광주에서는 홍콩어와 거의 똑같은 광둥어를 쓰기 때문에 감쪽같이 홍콩 사람인 척 하고 있을 뿐임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이교의 권유대로 홍콩의 시장경제를 상징하는 문물인 ‘현금인출카드’도 발급받은 여소군은, 그 후로 사기 영어학원에서 주정뱅이 강사 제레미에게 영어 욕설을 배우는 등, 홍콩에 적응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여소군이 이렇듯 유쾌한 이유는, 이교와 이교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생활이 그에게 신선한 자극과 함께 소속감을 주기 때문이다. 즉 여소군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관계 활동’을 되찾은 것이다. 이는 여소군이 이교를 자전거로 태워주면서 ‘이 느낌은 마치 무석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하는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여소군과 이교는 길에서 우연히 ‘첨밀밀’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른다. 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이교가 즐거운 듯 다리를 흔드는 모습을 오랫동안 잡는데, 이 장면을 통해 이방인이던 이교 역시 홍콩에서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처음으로 소통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편, 이 사이에 서브스토리로 고모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소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던 여소군에게, 태국 출신의 성노동 여성 ‘개란’은 부모님에게 보낼 편지냐고 묻는다. 이로써 개란이 부모와 집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소군은 이어지는 개란과의 대화를 통해, 고모가 입이 거친 포주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알고 표정이 굳어진다. 윌리엄 홀든을 사랑한다는 고모가 역시 미쳐서 아무나 윌리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또한 그 상태를 다른 남성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 여소군의 자전거를 얻어 탄 이후, 이교는 여소군에게 밥을 사주거나 성인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주는 대가로 맘대로 부리며 꽃 배달을 시킨다. 여소군은 투덜거리면서도 큰 반항 없이 이교에게 계속 이용당한다. ‘이교, 넌 모르는 게 없으니 공부도 잘했겠다.’ ‘넌 아는 게 없는데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나? 나는 농구 잘 해.’ 등, 재치 있게 받아치는 대사로 흥미를 유발하여 여소군이 농구를 잘 한다는 복선을 기억시킨다.

이때부터 이교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후로도 미키마우스는 옷, 뱃지, 자동차 장식품, 구양표의 문신 등으로 계속한다. 이는 이교를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부적과도 같은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생활력 강한 이교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착실히 장사 밑천을 모으고 있다. 잔액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인출기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배치함으로써 인물들의 표정을 섬세하면서도 코믹하게 잡아 기억시킨다. 이 현금인출 장면은 총 세번이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반드시 ‘기회 가구 상점’(Opportunity Furniture Store)를 지나는 장면으로 연결한다. 이는 현금카드라는 ‘시장경제의 홍콩’을 상징하는 은유와, ‘기회’라는 은유를 결합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장면이 결합되면서 ‘홍콩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교가 기회를 잡고자 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회 가구 상점을 지나면서 이교가 하는 대사도 이를 증명한다. ‘넌 왜 그렇게 돈이 없냐? 좀 똑똑하게 굴어 봐. 내가 널 가르칠 수만 있다면 넌 벼락부자 되는 거야.’ 즉 스스로 홍콩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대사이다. 앞으로 반복될, 기회 가구 상점 앞에서의 이교의 대사는 이교의 상황과 심리를 그대로 노출하는 대사가 된다.

2) 자본적 열망과 사랑 감정의 아이러니(1987년 구정 전야)

이교는 구정 대목을 노리고 등려군 테이프 노점을 차리지만 크게 망한다. 등려군은 대륙 사람들만 좋아하는 가수로서, 스스로 대륙 출신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중국인들은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토에서 등려군 테이프를 팔아서 한 몫 잡았던 이교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이 대륙에서 왔음을 고백하고 만다. 그러나 ‘우린 동지네?’ 라는 여소군의 말은 강하게 부정한다. 이는 이교가 처음에는 동지성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동지는 무슨 동지. 우린 홍콩말을 쓰고 홍콩 비디오를 보고, 웨이타나이(홍콩 브랜드의 음료수)를 마셔. 우린 홍콩 사람과 더 가깝단 말이야.’ 이교는 모든 기회가 차단된 중국에서 도망치고자 하며,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한다.

여소군 역시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거부하면 하나 뿐인 친구를 잃을까봐 당해줬다’는 사실을 밝힌다. 솔직한 이 말에 이교도 자신도 홍콩에 친구가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등려군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홍콩의 이방인임을 실감한 이 둘은, 이 낯선 곳에서 서로가 유일한 친구임을 터놓게 되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둘은 여소군의 집에 와서 마주보며 중국인들의 명절 음식인 훈둔(설날 만두국)을 먹은 뒤, 함께 설거지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여소군의 집에서는 찬물밖에 나오지 않기에, 설거지를 마친 이교의 손은 매우 차가워진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옷을 입으려 해도, 차가워진 손 때문에 단추가 잘 채워지지 않고, 보다 못한 여소군이 도와준다. 좁은 집에서 오랫동안 밀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이교는 자제력을 잃고 여소군에게 먼저 키스를 한다. 이를 신호로 두 사람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고 만다.

새해 아침이 된 다음 날, 여소군은 죄책감으로 소정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 뒤 이교의 생각을 물어보러 가나, 이교는 딱 잘라 ‘어젯 밤엔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두 사람이 만두국을 나눠먹었을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여소군이 서운한 표정을 짓자, 이교는 ‘집에 전화는 했어?’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너도 여자 친구 있잖아.’를 돌려 말한 것이다. 이어서 ‘근하신년’ 식으로 네 글자로 된 새해 덕담을 주고받던 이교는 다시금 ‘우정 만세’라고 말하여 둘의 관계가 친구임을 확실하게 규정하고, 여소군도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사이라고 규정한 상태이지만 육체적 관계는 여전히 지속하면서 여소군의 죄책감도 함께 커진다. 둘은 사랑에 빠졌음에도 친구 사이라는 말로 각자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관계를 지속하면서 이교는 여소군이 팬티 대신 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등, 서로의 내밀한 부분까지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들이 이용하는 여관에, 술주정뱅이 영어강사 제레미개란도 드나든다는 것도 발견한다. 이렇게 서브스토리로 제레미와 개란의 사랑 이야기가 삽입되는데, 여소군은 성노동자를 비하하는 단어인 ‘닭’을 사용하며 성노동자인 개란과 진지하게 연애하는 제레미를 이상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교는 여소군을 향해, ‘너도 닭쟁이면서.’ 라고 대꾸한다.

이교가 면박을 주는 장면에서는 실제 닭장 속의 닭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홍콩에서 여소군이 살고 있는 마치 닭장 같은 주거환경을 떠올리게 하면서, 또한 한 마리의 닭(여소군)이, 다른 한 마리의 닭(개란)을 향해 떠드는 것 같은 분위기로 연출된다. 마치 닭들이 직접 ‘개란은 나랑 한 집에 살아. 그 애 닭(성노동자)야.’ ‘너도 닭쟁이면서’라는 대사를 하는 것 같다. 카메라 역시 닭장을 훑으며 좁은 곳에 나란히 들어선 모두 같은 모습의 닭들을 보여준다. 즉 성노동자이든 아니든 결국 다 비슷비슷한 처지의 소시민임을 전달하고 있다.

죄책감 때문에 한 동안 소정에게 편지를 쓰지 못하던 여소군은, 함께 농구하다가 만난 한 남성 주방장과의 인연을 통해 부주방장이 되었을 때에야, 드디어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다.

여소군은 얼마나 잔액 확인을 하지 않았는지 현금인출카드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카드가 정지되고, 마르크(외환)가 올랐다는 이교의 말에 마르크가 누구냐고 물을 정도로 경제 관념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교는 등려군 테이프 장사에 한 번 실패했음에도 주식이나 외환 투자로 다시금 돈을 꽤 모은다. 사회주의 국가로서 계획경제 정책을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는, 일반인으로서 중국 본토의 주식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한 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홍콩에 가서 홍콩에서는 허락된 주식 투자를 하는 것뿐이다. 이교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홍콩 드림’을 꿈꾸며 홍콩에 왔던 것이고, 현금인출기샷과 연결된 기회 가구 상점 샷을 두 번째로 지나며 이교는 ‘홍콩 사람들은 시장통 아주머니들조차도 주식이니 외환 투자에 능숙하다’며 여전히 미래에 대해 자신만만해 한다.

이교의 꿈은 주식으로 큰돈을 벌어 홍콩으로 완전히 이주해 오는 것이고, 엄마에게는 집을 한 채 지어드리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는 여소군의 질문에, 이교는 ‘여기는 홍콩이야. 홍콩에선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대답한다. 사람은 꿈을 꿀 수 있어야 이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이교에게, 여소군은 자신은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러자 이교는 ‘네 꿈은 본토에 있는 애인을 데려와서 결혼하는 것이며, 작지만 꿈은 꿈이다’라고 결정해주다시피 한다.

이어서 ‘나는 본토에 애인이 없어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중국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꾸던 꿈과 이상은 모두 다 허사가 된다.’ 라고 말한다. 여소군은 그 말에, 이교는 자신과 연인으로서의 미래를 전혀 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꿈도 작고 이상도 없는데다가 중국 본토 남성이기까지 한 여소군은, 모든 면에서 이교가 바라던 대상이 아니다. 여소군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이교의 꿈을 정면으로 방해하고 있는 장애물 그 자체다. 꿈과 이상, 야망이 곧 정체성이던 이교로서는 여소군과 사귀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버려야만 하는 일이 된다. 이교가 여소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대화 장면 사이에, 한 대륙 출신의 부부가 푼돈 때문에 남들이 보는 데서 심하게 다투는 샷이 여러 번 쪼개져 삽입된다.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이교에게 여소군은 ‘그래도 저런 부부라도 밤에 집에 돌아가면 사랑이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여소군은 큰 꿈도 이상도 없으며, 소시민의 소소한 사랑에도 충분히 만족하는 청년이지만, 이교는 정반대다. 이 부부는 이교가 두려워하는 모델이다. 가난한 중국 본토 남자와 결혼해서 꿈도 희망도 없이 푼돈에도 쩔쩔매야 하는 구질구질한 삶, 이교는 바로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해 홍콩으로 온 사람이다. 여소군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런 구질구질한 삶의 도입부나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헤어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친구라는 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교는 여소군을 잃지 않고도 자신의 꿈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교는 이어지는 씬에서 여소군에게 ‘우린 좋은 친구지? 넌 나한테 가장 좋은 친구야.’ 라며 애정을 표시한다. 둘은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지만, 서로는 상대의 꿈의 정반대에서, 정면으로 방해하는 존재로 존재하기에 자신을 계속해서 기만한다.

3) 경제적 공황으로 인한 관계의 미끄러짐(1987년 10월)

홍콩의 중국 반환을 10년 정도를 앞두고 홍콩의 경기는 폭락하기 시작한다. 이교는 투자에 실패하면서 큰 빚을 진다. 기회 가구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홍콩에서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던 이교였지만, 세 번째로 지나는 씬에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다. 이 장소에서의 이교의 대사는 자신감을 상징했으나, 이제 자신감이 없어졌다는 의미다. 기회 가구 상점의 문도 평소와는 달리 닫혀 있는데, 이는 이교의 꿈으로 가는 입구가 닫혔음을 암시한다.

이교는 안마 일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조직폭력배 두목 구양표를 만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존재인 구양표는 이교를 도발하고 성희롱하지만, 이교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둘이 주고받는 대사는 역시 탁구공을 쳐 넘기듯 재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대사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구양표가 서브 남자 주인공이기도 하고, 여기서 등장한 모든 대사가 복선이므로, 관객들에게 기억시켜야만하기 때문이다.

‘나한텐 아주 세게 안마를 해야 해. 혹시 내가 아가씨 바꿔도 울지 마.’ ‘전 20년 동안 울어본 적이 없어요.’ ‘눈이 빨간데?’ ‘당신의 금시계를 보니 탐이 나서 눈이 벌개진 거예요.’ ‘입을 잘 놀리는데. 어때, 아르바이트 하지 않을래?’ ‘좋죠, 누굴 죽일까요?’ 구양표의 성희롱까지도 받아쳐내는 이교에게 구양표는 패배하고, 먼저 이 대결에서 도망치면서 묻는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냐?’ 하지만 이교는 마지막으로 더 강하게 받아친다. ‘저는 쥐 말고 무서워하는 게 없어요.’

배달부에서 부주방장으로 승진한 여소군의 상황은 점점 안정되어 가고, 이교에 대한 그의 마음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교는 더 이상 여소군에게 집중할 수 없다.

여소군은 이교의 건강을 걱정해서 닭을 요리해 가져오지만, 이교는 먹지 않는다. 닭은 여소군, 또는 여소군의 마음을 상징하는 장치로, 그것이 이교에 의해 거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소군은 등 돌린 이교에게 등려군 노래를 불러주며 손가락으로 이교의 몸을 건드린다. 이 장면은 여소군이 이교의 고민도 모르고 성가시게 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등려군’은 이 둘 사이의 교감과 사랑을 연결하는 공식이자 매개적 장치인데, 그 등려군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등려군 공식이 나오는 이 장면을 불쾌하게 그림으로써, 이교가 여소군의 사랑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래가 불투명해진 이교에게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 그어놓은 선을 애매하게 넘어오려는 여소군과의 관계조차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요소일 뿐이다. 여소군은 소정에게 줄 팔찌를 골라달라는 핑계로 이교에게도 팔찌를 선물하기 위해 보석상으로 데려간다. ‘소정에게 줄 팔찌를 네가 좀 골라줘’ 같은 여소군의 요청은 이교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말이다. 저런 대사들이 둘의 사이를 마치 안전한 친구인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교는 화려한 보석상 안에서 자신의 누추함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소군은 눈치 없이 남들 듣는 데서 안마 일을 운운하며, 버티고 있는 이교 내부의 자존심을 망가뜨린다. 여소군이 이교에게 팔찌를 선물하며 함께 빚을 갚자고 제의하자 드디어 이교는 폭발한다. ‘두 여자에게 주는 팔찌가 같은 것이라니, 넌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니? (…)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안정감이 없어. 길을 잃은 느낌이야.’ 라고 말한다.

미래를 꿈꾸는 것이 정체성이던 이교로서는, 꿈을 꿀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면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호소인 것이다. 이 대사를 할 때의 카메라는 흔들리면서 이교의 표정을 불안하게 포착한다. 길을 걸으면서 마치 길을 찾으려는 듯 불안하게 좌우로 둘러보다 걷다를 반복하며 이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길을 잃었어’고 말한다. 이 샷에서의 카메라는 여러 시점으로 조립하지 않고, 철저히 얼굴만 보여주며 편집점 없이 롱테이크로 뒤로 빠지고 있다. 이렇게 이들이 가는 길을 이들의 시점으로 전혀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정체성의 이교가, 그 길이라는 정체성을 잃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교는 이어서, ‘만약 소정이 다른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으면서,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겠니?’ 라고 묻는다. 여소군은 ‘난…기분 나쁠 거야.’ 라고 대답한다. 아무리 어수룩한 여소군이라도, 자신의 행동이 소정에게 배신이라는 것을 그간 몰라서 이렇게 대답한 것은 아니다. 이교 역시 여소군이 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 질문 자체가 그들이 지켜오던 관계를 끝내자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사랑에 빠진 둘은 스스로를 친구 사이일 뿐이라며 기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소군이 소정과 같은 팔찌를 이교에게 줌으로써 그 선을 넘어왔고, 이로써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기만을 지키기 위한 룰이 깨졌다.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니?’라는 이교의 질문은 룰을 어기고 있다는 경고다.

소정이 너처럼 그런다면 어떻겠느냐’는 이교의 질문 역시,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입으로 꺼냄으로써 암묵적인 룰을 깨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기만적인 관계를 그만두겠다는 이교의 의지이다. 여소군의 ‘나는 기분 나쁠 것’이라는 대답 역시 ‘우리는 기만적인 관계가 맞다’라는 자백이 된다.

여소군의 자백을 들은 이교는 마지막으로 ‘여소군 동지, 내가 홍콩에 온 목적은 네가 아니야. 네가 홍콩에 온 목적도 내가 아니야.’라고 말하고는 여소군을 두고 떠난다. ‘동지’라고 부름으로써 둘의 관계를 한정한 뒤, 결정적으로 헤어지자는 뜻을 확실하게 전한 것이다. 그간 형성되어 지켜져 왔던 룰들을 이교가 모두 깨뜨려가며 결별 선언까지 하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행동은 아니었다. 둘은 보석상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다. 넘치기 직전의 한계 상황에서 여소군이 안마 일을 언급함으로써 이교의 버텨내는 힘을 약하게 만든 탓이다. 즉 이 헤어짐은 한 방울의 홧김이 더해지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이교가 공을 던졌기 때문에, 이제 여소군이 그 공을 받을 차례가 된다. 그러나 여소군은 도저히 공을 받아 결별 과정을 마무리 지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여소군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결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안마방에 있던 이교에게 구양표가 다시 등장한다. ‘네가 아주 무서워한다기에 친구를 데려왔어.’라고 말하는 구양표의 등에는 용 문신 사이에 미키마우스 문신이 그려져 있다. 구양표를 처음 만난 순간의 이교는 가슴에 미키마우스 뱃지를 달고 ‘쥐 말고 무서운 게 없다’고 말했었다. 이를 기억했던 구양표는 미키마우스 문신으로 이교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

구양표를 안마하던 중, 드디어 여소군에게서 기다리던 삐삐가 온다. 그 내용이 당연히 ‘결별 선언’임을 알고 있는 이교는 손에서 힘이 빠진다.

‘왜 힘이 약해져? 애인한테 차였어?’ ‘고리대에 빚졌어요.’ ‘그거 경사 났네. 따로 돈 벌 생각은 있어?’

구양표의 이런 말들은 첫 만남에서 했던 성희롱적인 말들, ‘난 세게 해야 해.’ ‘입을 잘 놀리는데 아르바이트 할 생각 없어?’와 기표적으로는 같지만 기의는 완전히 다르다. 힘이 약해진 이유를 묻는 이유는 이교의 상황을 걱정하며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탐색하려는 것이고, 따로 돈 벌 생각이 있냐고 묻는 것은 예전에는 성희롱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너를 구원해줘도 되겠느냐’에 해당하는 구애의 질문이다. 이렇게 이교에게는 여소군이 떠난 바로 그 순간, 다른 구원의 남자가 등장한 셈이 된다.

그로부터 3년, 여소군은 자전거를 버리고 주방장 일만 하며 소정을 홍콩으로 데려올 준비를 마친다. 그 동안 홍콩의 경제는 더욱 더 불안해진다. 대륙 사람들은 모두 홍콩으로 오기를 바라는데, 홍콩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가야한다고들 한다. 자전거는 여소군이 새 인생을 시작하는 의미이자, 이교에 대한 마음을 상징하는 장치이다. 이 씬에서는 버려진 자전거에서 녹슨 벨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소군이 이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부분은 경제적 공황이 각자에게 불공평하게 작용하면서 서로의 위치를 어긋나게 만들고 서로에게 매개가 되었던 닭이나 자전거, 등려군이 가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4) 인내로써 증명해야 하는 사랑의 시험(1990년 가을)

3년이 지나 여소군은 소정을 데려와 결혼하고, 그 결혼식에 이교가 구양표와 함께 참석한다. 이렇게 둘은 서로의 꿈을 이룬 상태로 재회한다.

한 편, 건강이 몹시 나빠진 여소군의 고모는 자신이 젊었을 때 윌리엄 홀든과 페닌슐라 호텔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는 추억을 말해 준다. 하지만 여소군은 그리 믿지는 않는다. 또한 주정뱅이 영어 교사 제레미는 개란이 집에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태국에 데려가 줄 것이라고 한다.

이교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교의 엄마는 집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하며 꿈에 대한 허무를 이미 한 번 겪었음을 드러낸다. 이교는 여소군을 마주보며 급하게 음식을 먹는다. 둘이 처음 눈을 마주치며 떡국을 먹고 첫 관계를 했던 때처럼, 이 영화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서로를 향한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이다.

이렇게 재회하게 되면서, 이교는 여소군과 소정의 관계가 매우 건조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자전거도 안타고, 맥도날드 이야기만 나오면 조용해지고, 둘 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이교는 소정에게 죄책감을 느껴 직장도 소개해주고 웨딩사진용 웨딩드레스도 빌려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러느라 이교는 사진을 찍기 위해 턱시도로 갈아입으려던 여소군과 마주친다. 여소군은 아직도 팬티 대신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이 수영복은 이교에 대한 추억으로, 겉으로 가장되어 있지만 아직도 마음은 이교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교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여소군도 이교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여소군을 데려다 주던 중, 길에서 사인을 하고 있는 등려군을 발견한다. 여소군을 달려가 등 뒤에 사인을 받고, 그런 뒤에 둘은 헤어지려고 한다. 차에서는 공교롭게도 이별을 노래하는 등려군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 이교는 등에 등려군의 사인을 받은 채, 멀어지는 여소군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만 실수로 클락션을 울리게 된다. 그 소리를 들은 여소군은 이교의 표정을 보고 돌아와 키스한다. 이 장면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락션이 울렸던 이유는 이교가 여소군을 그리워하며 핸들 위로 무너지던 동작 때문이었다. 즉 이교의 내면의 소리가 클락션을 통해 드러나, 여소군을 부른 셈이다.

관계를 한 뒤, 여소군의 첫 대사는 ‘우린 결국 실패했어(We blew it).’이다. 이는 서로가 친구로만 남으려고 애쓰면서 각자의 꿈을 이뤘지만 그간의 꿈과 노력을 모두 날려버렸다는 뜻이다. 둘은 서로를 사랑한 나머지 이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꿈 대신 서로를 선택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교가 구양표에게 결별을 통보하려는 순간, 구양표는 쫓기는 몸이 되어 급히 홍콩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이교는 구양표가 떠나기 전 반드시 결별을 통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밀출국하는 구양표의 배까지 쫓아간다.

항구에서 여소군에게 ‘기다려, 빨리 돌아올게’ 라고 말하고 배를 탄 이교는, 막상 구양표를 만난 순간 그를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떠나버린다. 구양표는 이교를 위기에서 구원해줬던 남자였기에, 구양표에게 위기가 온 이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구양표는 이교를 돌려보내기 위해 ‘대만에 마누라도 천지니까 난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지만 이교를 꽉 안고 쓰다듬는 손은 정반대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교가 떠났음에도 여소군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대로, 자신의 꿈이었던 소정과 결별한다. 이교가 ‘금방 돌아올게, 기다려’라고 말한 것은 여소군에게는 정언명령이 된다.

그 즈음 고모가 죽고, 고모의 유산을 정리하던 중 윌리엄 홀든과 찍은 고모의 사진과 페닌슐라 호텔에서 가져온 식기들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모는 미친 것이 아니었으며, 단 한 순간의 사랑의 추억만으로 평생을 기다리며 행복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또한 제레미가 태국에 가려던 이유는 에이즈에 걸린 개란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부모 곁에서 지내게 해주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고모의 죽음과 제레미의 결단을 보면서, 여소군은 찰나의 사랑이라도 완성된 사랑의 한 형태이며, 헤어짐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고 가는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소군은 고모의 유산을 소정에게 모두 남기고, 자신은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고모나 제레미처럼 살기로 한다. 즉 마지막 사랑으로서 이교에 대한 추억을 안고 기다리는 것이다.

5) 운명이 안배하고 있는 연인 간의 시공간적 거리(1993년 가을)

또다시 3년 후,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여소군은 먼저 뉴욕으로 건너갔던, 함께 농구하던 사이의 주방장 밑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주방장은 여소군에게 맞선을 소개하며 새로운 사랑을 하라고 권하지만 여소군은 ‘어떤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거절한다.

한편 구양표와 이교도 여러 곳을 떠돌다가 뉴욕에 온 상황이다. 구양표는 여소군이 요리한 닭을 포장해 가서 이교에게 전달한다. 맛있다며 열심히 먹는 이교의 모습은 닭으로 상징되는 여소군의 존재가 근처에 있으며, 이교에게 우연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교는 구양표와 함께 뉴욕에서 함께 아이를 낳고 정착할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나 구양표는 갱들의 시비에 휘말려 그만 사고로 죽고 만다. 이교는 구양표와의 첫 만남에서, 20년 동안 울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으나, 구양표의 시신을 확인하는 절차에서 그의 등에 그려진 미키마우스를 보고는 처음으로 구양표만을 위한 눈물을 흘린다. 구양표의 죽음은 미키마우스, 즉 이교를 보호해주던 부적의 상실이다.

구양표가 죽는 사건 때문에, 이교는 미국 정부에 비자가 만료된 상태임을 들켜 강제 송환당할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공항으로 이송되던 도중 자전거를 타고 있던 여소군을 발견한 이교는 그를 잡기 위해 쫓아가고, 의도치 않게 출입국관리 직원들을 따돌리게 되어 불법 체류자가 되고 만다. 이교와 여소군이 이때 만날 수 없는 이유는, 그 둘을 잇는 공식에는 등려군이라는 매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이교로 하여금 아직 여소군을 만나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뉴욕에 남아 여소군 근처에 남도록 만든 셈이다. 이 두 연인이 준비가 되면 등려군이라는 사인이 나타날 것이다.

6) 서로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연인(1995년)

다시 2년 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때가 가까워져 온다. 이교는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비자를 갱신하고 뉴욕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마련하는 등, 합법적으로 중국에 돌아갈 준비를 마쳐간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교의 홍콩 드림은 의미가 없어지고, 꿈을 좇기 위해 홍콩에서 고군분투하던 모든 노력이 허무해진다. 세상의 룰은 정반대가 되어, 중국이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으며 홍콩 사람들도 본토에 가서 일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교가 자유의 여신상 근처에서 여행자를 통솔하는 동안, 여소군과 주방장은 뉴욕 전체와 자유의 여신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각자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재회할 준비가 될 때까지 운명은 둘을 계속해서 멀지 않은 곳에 안배하고 있다. 여소군과 주방장은 중국 요리집을 더 크게 키워서, ‘탑 오브 더 월드’라는 이름의 가게를 내자는 꿈을 나누고 있다. 여소군은 어느새 꿈도 이상도 없던 시골 청년에서, 야망을 이야기하며 두근거릴 수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나아가 새로운 기회의 땅인 중국 출신으로서, 이제는 이교를 위한 이상적인 남자가 되어 있다. 둘은 이렇게 서로의 꿈과 대립되었던 정체성이 사라지고,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재회할 준비를 마친다.

6) 운명이 보내주는 사인으로서의 등려군(1995년 5월 8일)

드디어 이교가 그린카드를 받는 데 성공하여 항공권을 구입,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등려군의 사망기사가 뜬다. 거대 스타인 등려군의 죽음으로 이곳저곳에서 등려군의 노랫소리가 들리게 된다. ‘등려군은 중국인들을 이어주는 가수로, 중국인이 있는 곳엔 반드시 등려군의 노래가 들린다’는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이처럼 중국인들을 이어준다는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뉴욕의 한 전파상 앞, 헤어졌던 동지적 연인들이 드디어 재회한다. 이 장면에서는 먼저 등려군의 뉴스를 보고 있는 이교 뒤로, 여소군이 스쳐 지나갔다가 등려군 기사 때문에 다시 돌아와 옆에 서도록 연출된다. 등려군이라는 공식이 지나치던 우연도 붙잡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이다.

등려군의 사망은, 더 이상 등려군이라는 매개를 쓸 수 없음을 뜻한다. 이제 둘은 등려군이라는 매개를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의 사랑은 이제 매개가 필요 없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등려군은 이렇게 모든 역할을 마치고 사라진다. 둘은 서로를 소환하는 매개 아이템을 모두 소진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마법을 이룬 것이다. 로맨스 장르에서의 운명적 사랑이라는 판타지성은 이렇게 드러난다.

6) 운명적 연인으로서의 재확인(1986년 3월 1일)

에필로그에서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여소군 뒤에서, 같이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가 벌떡 일어나 여소군을 깨웠던 뒷자리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교였다. 즉 영화는 이 둘이 처음부터 운명이었음을 확인시켜주면서 끝난다.


위 글은 [영화연구]에 게재한 논문을 요약한 것임

전혜정. (2018). 3장 구조로 분석한 〈첨밀밀〉의 로맨스 플롯과 영화적 장치 연구. 영화연구, (78), 20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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